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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by do전은 랄랄ra 2024. 3. 24.

210쪽

나는 인간이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환경에 어느 정도까지 굴복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제수용소를 네 곳이나 전전하다 살아 돌아온 사람으로서 

상상을 초월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용감하게 저항하고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것도 사실입니다. 

(중략)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다.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어느 순간에도 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중략)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중략)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고통(88쪽)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 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멸감(57쪽)

정작 참기힘든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다.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다.

구타를 당할 때 가장 괴로운 것은 그들이 주는 모멸감이었다.

 

사랑(77쪽)

하나의 진리를 꺠달았다. 그 진리란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중략)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 주오, 사랑은 죽음만큼이나 강한 것이라오."

 

 

정신적 자유(120쪽)

수용소에서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

인간에게는 모든 것을 뺴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뺴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척박한 호나경에 있더라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예) 죽음을 그렇게 의연하게 맞는 것이 인간으로서 참 위대한 성취였다. 

 

125쪽

이 젊은 여자는 자기가 며칠 안에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략) 그녀는 창밖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는 이 나무가 내 외로움을 달래 주는 유일한 친구랍니다"

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밤나무 가지 한 개와 그 위에 피어 있는 꽃 두 송이었다. 

"저는 저 나무와 자주 이야기를 나눈답니다."

(중략)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나무가 대답을 하는지 물었다. 

"물론지이요."

나무가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녀는 말했다.

"나무가 이렇게 대답해요. 내가 여기 있단다. 내가 여기 있단다. 나는 생명이야. 영원한 생명이야."

 

미래(129쪽)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중략) 평범한 환경에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낸다. 

 

비스마르크 왈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인간의 특성으로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떄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니체 왈

"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142쪽)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시련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시련으로부터 등돌리기(낙관적인 생각을 즐기는 것 등)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시련이 너무 많았다. 따라서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부종때문에 고생하는 동료에게 어떻게 나았냐고 물어보았다. 그가 대답했다. "실컷 울어서 내 조직 밖으로 몰아냈지"

 

집단치료(144쪽)

죽음의 진짜 원인은 희망을 버렸기 때문.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건강, 가족, 행복, 전문적인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이것은 모두 나중에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니체 왈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내가 살아남을 확률은 20명 중 한 명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희망을 잃거나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는 얼마나 엄청난 기회가, 그것도 아주 갑자기 찾아오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우리가 그동한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간직해 왔다는 것도 하나의 존재방식일 수 있다.

 

강제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인간의 영혼을 파헤치고, 그 영혼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이 떄에도 선과 악의 혼합이라는 인간 본연의 특성이 발견된다. 

 

158쪽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

 

 

 

 

2부.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덜 회고적이고 덜 자기성찰적이다. 로고테라피는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보고 있다. 

프로이트 학파가 쾌락, 아드리안 학파가 우월하려는 욕구로 불리는 권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에 초점을 맞춘 것

 

174쪽

내면의 긴장은 정신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

마음의 안정인 항상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오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181쪽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하기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존재의 본질로 보고 있다. (중략)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정신이 아니라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그는 더 인간다워지면,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 

 

180쪽 삶의 의미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사랑의 의미]

선/진리/아름다움 등을 체험하거나 자연.문화를 체험하는 것을 통해 

혹은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시련의 의미] 

시련의 도전을 용감하게 받아들이면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 의미를 갖게 되며, 그 의미는 글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보존된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따라서 제 삶은 절대로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임종의 순간, 그녀는 고통까지 포함된 자기 삶의 의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초의미]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무의미함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절대적인 의미를 합리적으로 터득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이 살므이 유일한 의미가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삶 그 자체는 의미 없는 것이 되고

그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은 그것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사실만으로 의미를 갖지는 못하기 때문이다.